조야첨재 4종 (궁체 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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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야쳠 해제
태조의 건국에서부터 숙종조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53권 53책의 한글 필사본.
윤형성(尹衡聖) 윤득재(尹得載)등이 편찬한 편년체의 사서.
간행년도는 1725년-1776년, 영조(英祖)년간이다. 원본은『국조보감(國朝寶鑑)』『용비어천가』 등을 참고해 엮은 것이다.
 이 책은 한문본 《朝野僉載》의 번역본으로 한문본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고려대학교, 중앙대학교, 간송박물관 등 국내에 소장되고 있는 5종을 비롯하여, 일본의 白山, 靜嘉, 幣原, 今西龍 등에 소장하고 있는 4종의 이본을 합하여 모두 9종의 이본이 전해지고 있는 자료다. 
내용은 주로 정변(政變)이나 전란(戰亂), 당쟁(黨爭) 등의 정치적인 사건들이다. 특히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 임진왜란, 광해군(光海君)의 실정과 인조반정(仁祖反正), 이괄(李适)의 난, 병자호란(丙子胡亂), 현종(玄宗)과 숙종(肅宗) 때에 치열했던 예송(禮訟)논쟁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실록 중심의 정사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야사(野史)의\ 기록까지 수록하고 있어 정사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이면의 역사를 고찰할 수 있다. 또한 임제(林悌)의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과 이 밖에 시(詩) 작품도 다수 수록하고 있어 문학적으로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 
정사보다 야사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이 시대의 사서(史書)의 편찬 경향과 조선 왕조의 역대를 개략적으로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조야첨재는 한글본이 두 본이 있데 본 자료는 그중 하나로 태조로부터 英祖 年間(1725 – 1776)까지를 기록한 53권 53책 분량의 자료다. 서체가 깨끗하고 활달하며 비교적 작은 서체임에도 본 자료를 해석하여 소개하는 이유는 언문 글씨의 정갈한 표현도 이리도 다양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변화가 심한데 감탄하여 여기 그 자료 하나를 해석하여 본 것이다. 대체적으로 조야회통과 그 류(類)를 같이하는데 내용면에서나 편찬형식이 비슷하다. 궁체의 흘림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흐름의 변모는 고식적인 궁체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서학자들에게 응용 가치가 크다고 사료된다. 같은 내용을 다루면서 서체를 달리한 00권 00책의 이본이 있어 따로 정리하여 출판한 바 있으니 참조할 수 있다. 이본의 서체는 더욱 궁체에 가까우면서 변화된 특성과 개성을 살린 작품이다.
조야회통과 매우 유사한 내용들이다.-민족문화백과사전 참조/부분인용
-고은 지성룡-

조야쳠 해제
태조의 건국에서부터 숙종조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53권 53책의 한글 필사본.
윤형성(尹衡聖) 윤득재(尹得載)등이 편찬한 편년체의 사서.
간행년도는 1725년-1776년, 영조(英祖)년간이다. 원본은『국조보감(國朝寶鑑)』『용비어천가』 등을 참고해 엮은 것이다.
 이 책은 한문본 《朝野僉載》의 번역본으로 한문본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고려대학교, 중앙대학교, 간송박물관 등 국내에 소장되고 있는 5종을 비롯하여, 일본의 白山, 靜嘉, 幣原, 今西龍 등에 소장하고 있는 4종의 이본을 합하여 모두 9종의 이본이 전해지고 있는 자료다. 
내용은 주로 정변(政變)이나 전란(戰亂), 당쟁(黨爭) 등의 정치적인 사건들이다. 특히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 임진왜란, 광해군(光海君)의 실정과 인조반정(仁祖反正), 이괄(李适)의 난, 병자호란(丙子胡亂), 현종(玄宗)과 숙종(肅宗) 때에 치열했던 예송(禮訟)논쟁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실록 중심의 정사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야사(野史)의\ 기록까지 수록하고 있어 정사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이면의 역사를 고찰할 수 있다. 또한 임제(林悌)의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과 이 밖에 시(詩) 작품도 다수 수록하고 있어 문학적으로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 
정사보다 야사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이 시대의 사서(史書)의 편찬 경향과 조선 왕조의 역대를 개략적으로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조야첨재는 한글본이 두 본이 있데 본 자료는 그중 하나로 태조로부터 英祖 年間(1725 – 1776)까지를 기록한 53권 53책 분량의 자료다. 서체가 깨끗하고 활달하며 비교적 작은 서체임에도 본 자료를 해석하여 소개하는 이유는 언문 글씨의 정갈한 표현도 이리도 다양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변화가 심한데 감탄하여 여기 그 자료 하나를 해석하여 본 것이다. 대체적으로 조야회통과 그 류(類)를 같이하는데 내용면에서나 편찬형식이 비슷하다. 궁체의 흘림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흐름의 변모는 고식적인 궁체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서학자들에게 응용 가치가 크다고 사료된다. 같은 내용을 다루면서 서체를 달리한 00권 00책의 이본이 있어 따로 정리하여 출판한 바 있으니 참조할 수 있다. 이본의 서체는 더욱 궁체에 가까우면서 변화된 특성과 개성을 살린 작품이다.
조야회통과 매우 유사한 내용들이다.-민족문화백과사전 참조/부분인용
-고은 지성룡-

조야쳠 셔 (한글 고문 지원이 안 됨)
우리 동방(東方)의 문헌(文獻) 지칭(指稱)이 그 오미 먼지라. 은(殷)태 긔(箕子)셜교(設校)양휵(養慉)므로브터 문인(文人)과 셕(碩士) (代)마다 사이 업지 아니 야 졔가(諸子百家)와 태의 실닌 바 겨유 초츤(髫齔)을 
나 강습(講習)지 아니미 업 홀노 국조(國朝)고실(古室)은 홀(忽)
야 살피지 아니믄 엇지뇨. 다만 젼의 젼긔미 만히 궐
야 문헌(文獻)을 징험(徵驗) 젹고 셕실비쟝은 혹도 엿
보지 못니 만후이 어로조 셰리오. 아
조실은 비(比)컨 가의 문 거 만연(漫然)이 엇지 
지 아지 못니 엇지 어긔지 아니리오.   이를 젼

현대어 풀이
우리 동방(東方)의 문헌(文獻) 지칭이 그 오미 먼지라. 은(殷)태사 기자(箕子)설
교양휵(設校養慉)함으로 부터 문인(文人)과 석사(碩士) 대(代)마다 사람이 없지 
아니하야 제자백가(諸子百家)와 태사(太史)에 실린 바를 겨우 초츤(髫齔)을 
떠나매 강습(講習)지 아님이 없으되 홀로 국조고실(國朝古室)은 홀(忽)하
야 살피지 아님은 어찜이뇨. 다만 전배(前輩)의 전기(傳記)함이 많이 궐(闕)
하야 문헌(文獻)을 징험(徵驗) 할 데(곳) 적고 석실(石室)비장(秘藏)은 혹도 엿
보지 못하니 만학(晩學)후생(後生)이 어디로 좆아 자세(仔細)하리오. 아
조(我朝)사실(史實)은 비(比)컨대 자가(自家)의 문내사(門內史) 같거늘 만연(漫然)이    어찌 한
지 아지 못 하니 어찌 어기지 아니리오. 내 또한 이를 전

현대어 풀이
한글 조야(朝野僉載) 권 12
중종조 일(中宗朝 一)
중종공희휘 문소무흠인성효휘 대왕자(中宗恭僖 徽 文昭武欽仁誠孝諱 大王字)
성종(成宗) 제 이자(二子)이시니 정현황후께옵서 성종 십구
년 무신 삼월 초 오일에 탄생하오셔 처음에 진성
대군을 봉하시고 구남 십 일녀를 두시니라. 비(妃)는 공
소순희 단경왕후 신씨 전거창 죄의정 이창부원군
신도공 수근의 여(女)시니 금상(今上) 기미에 복위하사 부묘(祔廟)
하시고 능호(陵號)를 추봉(追封)하여 온능(溫陵)이라 하며 무자(無子)하시다. 
비 선소의숙장경왕후윤씨 적 파평 영돈녕부사 파원
부원군 여필의 여시니 처음에 숙의를 봉하시고 정


중종-조선 제 11대왕(1488~1544, 재위 1506!1544). 휘는 懌, 자는 樂天, 연산군의     이복동생, 성종의 2자로 반정하여 성공, 그러나 수구파에 의해 1519년 기묘사화를    초래.
성종-조선 제 9대왕,(1454~1494, 재위 1469~1494). 학문을 좋아했고 특히 射 藝 書    畵를 잘 했다.
정현황후-성종의 계비 윤씨. 중종을 낳았다.
금상(今上)-지금의 임금이란 뜻. 
단경왕후 신씨-중종의 비. 폐위되었다가 복원.
능호-능의 이름.
온능-중종의 원비 단경황후의 능. 
숙의-궁녀의 내명부 품계. 종 2품.